준우(가명, 중1)의 상담을 의뢰받고 많이 망설였다. 상담교사조차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준우는 예사로운 아이가 아닌 듯 했다. 따돌림을 당하고 가정 폭력도 겪었다. 중학교에 와서는 장기 결석으로 1학기를 마치고 결국 기숙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여전히 적응을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단다.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 친분이 있는 교장선생님까지 전화가 와서 특별히 부탁을 하니 더 이상 거절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준우는 상담을 받지 않겠단다. 그래서 우선 부모부터 상담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10회기 부모 상담이 잘 진행되었다. 특히 준우 아버지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아들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나도 준우에 대한 관심도 커져 가끔 문자를 보내기도 했지만 준우는 답이 없었다.
그런데 부모 상담이 끝난 뒤 준우가 상담을 받겠다고 연락이 왔다. 잘 될까 하는 걱정은 사라지고 기대감이 솔솔 피어났다. 하지만 첫 상담부터 나의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준우는 벽창호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식, 상담 수없이 받았는데, 그 뻔한 ‘공감’, 자기한테는 안 먹힌단다. 저항이 심했다. 아버지한테 심하게 맞은 경험은 전이되어 나를 향했고 나 또한 역전이 경험을 여러 번 했다. 4회기가 진행되는 동안 준우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상담오기를 최종선택한 건 너인데 이러다 갈거냐”니까 상담을 안 받으면 태블릿을 압수당한단다. 하루 8시간 하는 컴퓨터 게임을 위해서 오는 것이지 상담 받을 마음은 일도 없단다.
준우를 보내고 내다보는 상담실 창밖 풍경은 늘 흐렸다. 자괴감도 생겼다. 집에 일이 생겨 5회기 상담을 못 온다고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다. 시간이 생겨서일까 별 관심 안 가졌던 상담 녹음을 털었다. 아뿔싸! 눈치 구단 준우의 말에 휘말리기도 하고 역전이가 보이고 나도 모르게 준우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조언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뻔한 공감’을 말하는 애한테, 힘든 일들을 많이 겪은 열네 살 애한테 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문제에 치중하느라 준우라는 존재에 깊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한 주 내내 이 생각에 잠겼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2주 만에 만난 준우는 여전하다. 종이컵 물을 흘리고 컵을 손아귀에 넣어 짓뭉갠다. 가만히 그 장면을 머물면서 이러는 네가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다. 깊이 응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준우를 보려 애썼다. 내 눈빛이 달라보였나 보다. 준우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다. 술술 이야기를 한다. 준우는 ADD(주의력결핍) 판정을 받고 약을 먹고 있는데, 여학생들 앞에서 특히 힘들다고 했다. 힘이 약한 같은 반 아이한테 상담해 준 이야기도 했다. 자기 걱정하는 엄마가 안쓰럽단다. 준우의 두터운 입술에서 겸연쩍은 미소를 처음 봤다. 예전 상담에서 가는 곳 마다 심리검사를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고도 했다. 내가 문장완성검사지를 내밀었을 때 “이런 거 안 한다”던 준우의 반응을 이제 이해하겠다. 공감이 맞장구를 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담은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겼다. 준우는 일어나면서 손을 내밀었다. 처음으로 한참 포옹을 했다.
그런데 다음 5회기 상담에 준우가 오지 않았다. 상담 때문에 부산에 갔다 일도 다 못보고 밥도 굶고 급히 왔는데... 한 시간 뒤에 준우가 전화가 왔다. 게임하느라 그만 잊어먹었다며 지금 가도 되겠냐 물었다. 매주 금요일 하던 상담을 이번 주에 일요일로 바뀐 게 문제가 된 걸까 이미 집에 왔으니 다음 주에 연락하자 했다. 나의 음성에는 약간 짜증이 섞여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준우 아버지 전화가 왔다. 약속을 어겨 테블릿을 압수했고 준우는 상담을 더 가지 않겠다고 했단다. 준우 주려고 책을 주문했는데 택배노조 파업으로 책도 못 줬다. ‘주의력결핍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괜찮아! 조금 벗어나도」라는 책이다.
열흘이 지났다. 준우 전화 받고 다음 주 연락하자고 한 나의 짜증 묻은 말이 머리를 후려쳤다. 준우한테 카톡을 했다. 모자 눌러 쓰고 검은 패딩입고 상담실 문 쓰윽 열고 들어오는 준우가 자꾸 생각난다고. 주고 싶은 선물도 있다고 했다. 종일 카톡을 읽지 않더니 밤늦게 날아온 답신,
“시간 한 번 잡아보시죠”
마지막 상담에서 “선생님, 다음 주부터는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요” 라던 준우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고 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