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서정대학교 소방안전관리과 교수

올봄부터 흙을 처음 만졌고 찬바람 이는 지금까지 매주 마음이 감산되는 시간구조화가 되었다. 호미를 들고 손을 재게 놀리며 잡념을 솎아내다 보면 너무나 많은 우연이 한 생명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나의 행위와 땅이 길러낸 것 사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매끄러운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정성을 들여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어도 햇빛과 바람, 비, 땅벌레 등속이 허락해야만 내 손에 한 장의 상춧잎이라도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고 몸이 일깨워준 ‘단순함’이었다. 나는 염원과 노력으로 그 흐름에 참여할 뿐이다.
대개 사람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면 마음이 꺾인다고 한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 유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땅과 씨름하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응시할 때, 후련함 같은 감정이 찾아들었다. 밥벌이가 따로 있어서, 농사를 가볍게 생각해서 후련했던 것이 아니다. 소출에 욕심이 없어서 품었던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들인 노력의 질과 양을 부풀리지도, 그렇다고 축소하지도 않을 수 있는 자리에 섰을 때 느꼈던 감정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 농작물의 운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사소한 존재와 사건들의 힘을 새롭게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존중하면 나를 소중히 대할 틈이 마련된다. 일의 성패를 온전히 나의 몫으로 삼지 않을 수 있기에 역설적으로 즐거운 땀을 쏟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스스로의 내면을 다스릴만한 공간을 발견했다는 것도 재고해 보면 하나의 성장일 수 있을 것이다. 위기와 극복으로 점철된 성장 시나리오와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찾아낸 성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장의 문법 밖에서도 나를 새롭게 할 경험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정형화된 성장 시나리오의 압력에서 한발 물러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
얼마 전 ‘가짜사나이’라는 유튜브 콘텐츠가 큰 인기를 끌었다. 방만한 일상을 보내던 일군의 유튜버들이 UDT 훈련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깨닫고 발전의 동력을 마련하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교육생들에게 고통스런 임무를 부여하고 냉혹하게 완수하기를 요구하는 교관들의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넋이 빠졌다. 또한 미국 시민권자였던 한 교관의 이력은 대중의 민족주의적 입맛과 결합하며 인기몰이에 힘을 더했다. 세태를 등에 업은 밀러터리 컨셉 상품과 광고가 쏟아져 나오며 뉴미디어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뜯어보면 사실 콘텐츠의 서사는 단순하다. 고통과 극복, 긴장과 이완이라는 이원적 구조가 그 기둥이다. 그리고 내용의 8할은 교육생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신음소리로 채워져 있다. 대중들은 왜 이들의 고통에 열광하며 적극적으로 소비하려고 할까 그들이 보여준 감동적인 장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한 자들에 대한 선망, 성장의 기회를 가진 자들에 대한 대중의 질투와 회한이 속내일 것이다. 한 번의 인기몰이 이후에 교관들의 과거사가 불거지며 날 선 말들이 시끄럽게 부딪쳤던 일을 생각해보면 그 인기의 성분이 분명해진다.
일상이 정지된 공간에서, 강제하는 힘에 의지해서 달성되는, 남의 성장이 내 삶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자신의 삶에서 벌어진 일들의 가치를 정당하게 해석해낼 언어가 빈곤하다는 사실이 이러한 열광의 이면에 서려 있지나 않을까 우려되는 장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장이란 나를 극복하는 서사뿐이라는 점이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고 질투를 끌어내며 타인의 삶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성장의 문법은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수많은 우연들을 모두 나의 책임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아닌가. 그들의 고통이 그 강도를 더할 때 내가 느끼는 감동이 더불어 짙어진다면 결이 다른 반성에 몰입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 문턱이다. 봄에 심었던 모종들은 진즉 할 일을 마쳤다. 더러는 말라 죽고, 더러는 바람에 눕고 했다. 남은 것들이 극기를 통해 성장했는지 어쨌는지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모종이 한 해의 역할을 잘 해낸 것은 내 노고와 햇빛과 바람, 비와 토양 덕분이라는 것, 무당벌레와 꿀벌 덕분이라는 것 말이다.
한 인간의 성장에도 무수히 많은 존재가 참여한다. 지금의 당신을 성립시킨 경험들은 혼자 마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처럼 삶에 날아든 행운과 번개처럼 내리꽂힌 불운의 장대한 함수가 만든 지금이다. 사랑하는 사람, 관심 없는 타인, 처음 보는 풍경과 익숙한 거리에서 한 조각씩 취하여 조립한 지금일 것이다. 삶을 극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유의 목소리로 안정된 성인자아를 정련해보자. 그러므로 나는 바란다. 자신을 정당하게 대하기를, 스스로의 노력을 부풀리지 않고, 비하하지도 말고 나의 주변을 음미하면서, 우리의 성장은 문법의 밖에 있다는 것을 정밀하게 관찰하기를, Eric Berne의 교훈을 반추하며…… ■
| [이전] 오늘도 아모르 파티 Amor fati 2020-11-01 |
| [다음] [소식] TA인 2020 11월호 발간 2020-11-01 |
